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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금강경 – 1

맛! 금강경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며 초봄의 들녘은 습기를 머금고 촉촉이 젖어 봄 햇살에 반짝입니다. 그 위로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지 가지의 연초록의 싹들이 올라옵니다. 물기에 질척이는 밭길을 걸어 아직 찬기가 무성한 땅을 가까이하고 앉아, 아낙들은 먹을 수 있는 어린 싹을 골라냅니다. 그렇게 채취된 봄나물은 풍미 가득히 식탁을 장식하지요. 달래의 씁쓸함, 냉이 시 금 쌉쌀한 맛, 돌나물의 아삭함, 곰취의 향긋함. 이들은 겨울 추위에 무뎌진 우리의 입맛을 자극합니다.

봄을 타고 자라는 저 나물이 그렇듯, 땅을 기대어 햇살, 비, 바람을 맞고 자라는 사람의 모든 먹거리는 그리 ‘맛’을 가집니다. 그리고 어떤 맛은 삶을 건강하게 만들며 살리지요.

나물, 과일, 그리고 가지가지 음식의 각기 다른 맛처럼, 진리와 부처라는 풍요의 땅에 기대어, 여러 다른 언어와 역사, 문화를 만나 발전한 불교의 수많은 경전 또한 ’맛’을 가진다 한 스승은 얘기했습니다. 영양의 좋은 맛의 음식이 삶에 힘을 불어 넣고 생명을 살리듯, 불자가 읽는 경전의 가르침과 그 안에 든 맛은 사람의 병든 마음을 치유함은 당연한 이치일테지요.

그 많은 경전 가운데, 봄이 지척인 오늘은  금강경의 맛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어려운 교리적 이론적 설명을 내려놓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입안에 도는 풍미와 향을 느끼며 설명하듯, 저는 그 경전의 맛과 향을 전해 보려 합니다. 한 가지의 음식이 먹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다르듯, 지금 설명하는 금강경의 ‘맛’은 이 글을 쓰는 저의 삶의 기억과 경험입니다.

경전의 자세한 맛의 설명에 앞서 먼저 궁금한 것은,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이 음식과 같이 맛은 가진다는 함은 그 뜻이 무엇일까요?

언어와 문자는 전하고자 하는 그 안의 의미 그리고 뜻과 함께 말을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 어떤 느낌을 전달합니다. 해서 뉴스를 읽다 보면 어떤 정치인의 연설이 사이다 같다는 표현을 종종 만납니다. 말이 사이다 같다 함은 그 사람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마치 속이 답답할 때 먹는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을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전한다는 말일테거요. 말이 사이다 같은 사람이 있어 듣는 이의 기분을 청량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입담이 구수한 사람은 지루한 얘기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말을 합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은 말이지만, 말은 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그것을 듣는 사람에 따라 미묘한 느낌의 차이를 주고받습니다.

또한 몸에 좋은 약은 그 맛이 쓰다는 비유에서 보이듯,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충고, 조언, 가르침은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과 언어를 통해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며, 그 주고받음 가운데 어떠한 느낌이 따라오고, 듣는 이의 마음 가운데 일으키는 감정의 결, 그것이 곧 말의 맛이 될 것입니다.

연기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삶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좋든 싫든 끊임없이 말에 묶여 살아야하는  우리는 관계의 존재들입니다. 항상 말이 잔치같이 풍년인 그 인간 관계 속에서, 많은 말은 실수를 종종 가져오기에 침묵은 금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말은 가시처럼 혹은 독처럼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또는 병들게 하지만, 어떤 말은 사람의 병든 몸과 마음을 살리고 삶을 행복하게 말들지요. 이것들은 모두 말이 만드는 감정의 결이 만드는 결과이지요.

그래서 삶이 가진 고통의 해방을 위해 부처가 중생을 위해 간절히 했던 말들, 즉 그 기록인 경전이 맛을 가진다 함은 달리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거대한 법의 땅에 기대어 자란 경전의 맛은

무엇일까요?

문자로 쓰여 오늘에 전해지는 불교의 수많은 경전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을 만나 주고받은 대화의 기록이 그 시작입니다. 북인도의 이곳 저것을 떠돌아 살며 부처는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마음의 청정함을 위해 혹은 저마다 가진 마음의 병의 치유를 위해 진리의 언어, 법을 전했습니다. 강이 땅끝을 지나 이루는 그 바닷물의 맛이 한가지 인 것처럼,  깨달은 자가 설하는 진리의 가르침은 한 맛이라 옛 스님들은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말을 떠나 있는 것으로, 언어로 삶의 실상을 완벽히 묘사하고 설명한다 함은 불가능하다고 또한 얘기를 합니다.

달이 중봉에 숨으니

부채를 들어 그것에 비유하고

바람이 큰 하늘에서 쉬매

나무를 흔들어서 그것을 알리도다

중국 송나라 때의 야부 스님은 금강경을 설명하시며 위에 시를 통해, 궁극의 진리는 높은 산 뒤에 숨어 발게 빛나는 달과 같은 것이고, 허공 속에 멈춘 바람처럼 자취가 없는 것이라 설명하셨습니다.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리는 말을 초월해 있으나, 언어 말고는 그것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지요.

그래서 여래는 몸을 낮추어 쉼 없이 길을 걸으며,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행복을 위해  진리의 언어, 법의 수레를 굴렸습니다. 그렇게 깨달음의 청정한 땅위에 부처라는 나무가 자라고, 진리의 언어가 세상을 향해 열립니다. 그렇게 중생을 위해 평생을 쉼없이 간절히 했던 말은 부처의 열반 후 함께 모인 제자들의 기억에 의하여 다시 살아난 경전이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경전은 역사와 시간이라는 바람을 견디며, 인도를 넘어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전해지고,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라는 비를 먹고 자라, 오늘날의 팔만사천의 많은 경전으로 전해집니다.

정말 궁금한 것은 부처님의 실제 목소리는 어떤 말의 느낌, 맛을 전했을까요?

그 법의 한 맛은 역사를 통해 팔만사천의 맛을 이루었고, 금강경은 그 가운데 한 맛을 이루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반야부 경전에 속하는 금강경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 경전이지요. 말하자면 조계종에 속한 모든 스님과 불자들이 의지해야 하는 경전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기에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큰 스님들의 주석과 설명이 있었습니다. 스님마다 조금씩 달리 금강경의 핵심을 설명하지만, 대부분 지혜로 보는 삶의 모습, 공의 원리가 금강경의 핵샘이라 공통으로 설명합니다. 공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금강 같은 지혜로 우리 저마다가 가진 마음의 어리석음을 부수라는 가르침이 금강경의 큰 뜻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금강경이 가르침이 주는 맛은 공의 맛, 허공의 맛, 텅 빈 충만의 맛, 없는 가운데 무언가 있는 역설의 맛, 하얀 백자에 담긴 깨끗한 물맛, 이러한 맛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스무 살 언저리 처음 금강경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소문난 맛집을 찾아갔지만,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는 당황스러움이었습니다. 사춘기가 지났으나 아직도 삶의 길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운 스무 살 언저리의 나이. 삶과 세상의 비밀을 엿보겠다는 욕심으로 소문난 경전을 찾아 읽었지요. 하지만 공의 의미처럼 역설 같은 언어의 유희를 담고 있는 금강경의 언어는 명쾌하고 분명한 맛을  원하는 성질 급한 청년에게 크게 흥미롭지 못했습니다. 저 허공의 맛이 그렇듯 밍밍했다는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백자에 담긴 물과 같은 금강경의  담담한 맛을 느끼기에 어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여느 한역 경전처럼 금강경도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네 글자로 시작을 합니다. 경전이 되기 위한 일종의 증명서같은 문구이다 보니 예부터 많은 스님께서 여시아문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설명은 하셨습니다. 옛 스님들의 다소 철학적이고 어려운 여러 해석들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는 잠시 뒤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여시아문을 통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말을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분명 사람 사이에 말이 오고 갔고, 의미가 오고 갔고, 어떤 느낌이 오고 갔으며, 이를 통해 마음에 감정의 결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후 경전은 부처님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 수보리가 주고받은 대화가 경전의 끝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그 듣는 ‘나’는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에 함께했던 사람일 수고 있고, 혹은 그 대화가 끝난 후에 그것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나’일 수 도 있을테지요. 또 다른 해석으로 그 ‘나’는 지금 경전을 펼쳐 부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지금의 ‘나’이기도 할 것입니다.

원숭이는 고개위에서 울고

학은 숲속에서 우는데

조각구름은 바람에 걷히고

물은 긴 여울져 흐르도다.

가장 좋은 늦가을의 서리 내린 한밤에

새끼 기러기 한 소리가 하늘이 차가움을 알리도다.

야부스님이 쓰신 위의 표현처럼 진리의 음성은 찬 밤 구름 낀 하늘 아래 어두운 공기를 가르는 소리 같은 것으로, ‘나’는 그 어둠 가운데 법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게 찬 번뇌의 밤이 지나고 내 기억과 언어는 법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여기서 진리의 소리, 법을 세상에 전하는 ‘나’의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전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모든 경전을 읽으며 그 첫맛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나’의 마음을 느낍니다.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比丘)들 1,250사람과 함께 계셨다.

어제처럼 오늘이 갑니다. 어느 시간인지는 정확히 때를 알 수는 없으나 경전은 부처님이 살아 계셨던 ‘어떤 날’을 소개합니다. 시간이 흐리지 않는 공간이 없고, 공간은 시간을 담는 그릇입니다. 부처님은 북인도의 여러 국가 중 한 나라인 사위국에 계셨고, 부처에 대한 믿음이 깊은 불자가 보시한 기수급고독원에 머무셨습니다. 이를 통해 법의 가르침은 저 높이 떠 있는 허공 어딘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가 발딛고 사는 땅, 현실적 시간과 공간에서 시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높고 높아 당당함이여.

만법 가운데 왕이로다.

삼십이상이요

백천 가지의 빛이로다.

성현, 범부가 우러르고

외도가 귀의하여 항복하도다.

자비로운 모습 뵙기 어렵다 이르지 말라.

기원 대도량에 아직 그대로 계시도다.

그곳에 부처는 당신의 제자들,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부처는 깨달아 홀로 위대하고 거룩하지만, 사람을 떠나 홀로 살거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그 제자들은 가르침의 한 맛을 통하여 통하여 큰 비구, 아라한이 된  성인입니다.

금강경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가보지 못한 저 장소와 시절이 간절히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큰 비구가 되지 못했고, 그래서 한 맛인 법의 음성, 부처의 목소리가 진정 궁금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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